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 제국 (문단 편집) == 각국에서의 이미지 == 몽골 제국의 위세가 워낙 컸기에 아직도 [[유럽]]과 [[이슬람교]] 문화권에서는 [[칭기즈 칸]]을 학살자나 위대한 정복자로 보는 등 시선이 갈린다. [[몽골]]에서는 당연히 자랑스러운 자국의 [[전성기]]이자 세계 제국의 건국자로 다룬다. [[대한민국]]에서 받는 평가는 의외로 아주 나쁘지는 않다. [[고려시대]] 때는 몽골 제국에게 꽤나 가혹하게 수탈을 당한 국가들 중 하나였음에도 평가가 박하지 않은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꼽히는데, 우선 700년 전으로 굉장히 오래전 일이기 때문에 현대 한국인들에게 직접적인 경험이 부재하며, 무엇보다 몽골이 워낙 급성장했다가 급축소된 국가이다보니 한반도의 역사 중에서 몽골과의 교류 자체가 이 시기 말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몽골에 시달렸던 역사는 존재할지언정 몽골을 지금까지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다. 당장 그 유명한 노래 [[징기스칸(노래)|징기스칸]] 부터가 바로 그 서양나라 독일에서 만들어진 음악이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보면 또 고려 출신의 기황후가 몽골 제국을 쥐락펴락 했다는 사실 때문에 세계적인 대제국을 우리 민족이 장악 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도 좋다.[* 단, [[기황후]]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황후는 고려를 위한 행동 따위 '''전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강한 교수의 연구로는 기황후가 원나라를 장악한 이후 고려에서 원나라로 보내는 조공의 양이 더 늘었다고 까지 한다. 결정적으로 반원정책을 펼치며 자주성을 회복하려 노력하던 공민왕을 응징하기 위해 '''고려 침략군'''까지 보냈던 여자다. 물론 기황후 입장에서도 고려는 자신을 상납해버린, 혹은 팔아먹은 못난 조국이라 단순히 민족배반자라 하긴 뭐하다. 아무튼 기황후가 원나라 실권을 쥐었음을 자랑스러워 하는건 다소 엇나간 혈통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황후는 고려의 반원 자주책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자신의 옛 조국을 침략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로 치자면 조선 [[여자]]가 일본에 끌려간 후 출세하여 일본의 [[황후]]가 된 다음 자기 조국이었던 조선을 더욱 가열차게 수탈하고 독립운동을 유혈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것과 같다. 때문에 사극 기황후는 역사왜곡이란 비판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문제작이었다.] 아무튼 몽골에 대한 한국의 인식은 워낙 오랜 옛날이라는 점+오랫동안 마찰을 빚고 싸운 중국, 일본과 달리 딱 한번이라 묻힌다는 점+현재 몽골의 국력이 한국에게 상대가 안되는지라 경쟁의식이나 위협론이 없다는 점+동양에 의해 세계 제국이 건립되었다는 [[오리엔탈리즘]] 대리만족[* 다만 몽골의 발흥이 송, 금, 고려 등 발전된 문명을 파괴시켜 동양 문명을 후퇴시켰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특히 남송의 경우 중국사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융성한 문화를 가진 국가였기에 송의 멸망은 동아시아 문명 쇠퇴 그 자체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수학, 천문학 등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던 이슬람 문명의 몰락 또한 몽골이 원인인 측면이 있다.]+그리고 소년 만화를 연상시키는 칭기즈 칸의 영웅담적인 서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과거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 치고 나쁘지는 않다. 다만 2020년대 들어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유린하고 전 유라시아를 파괴하며 문명을 후퇴시킨 몽골 제국의 파괴자로서의 성격이 부각되며 차츰 몽골 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늘고 있다. [[고려]] 역시 몽골에 의해 어마어마한 인명피해를 겪고 [[황룡사]]를 비롯해 수많은 고대의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한국인들 역시 과거와 같이 동아시아 국가라는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우호적인 시선에서 바라보지는 않는다. 이러한 추세의 원인으로는 한국 역시 피해자임에도 한때 우호적인 시선에서 바라보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작용과 과거보다 몽골의 잔혹한 파괴와 학살 행각이 꽤나 알려지게 되었다는 점이 있다.[* 몽골의 침공과 학살 때문에 고려의 인구수가 절반으로 줄었으며, 마차의 수레바퀴보다 큰 남성을 모두 죽이는 형벌을 받은 타국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식으로 몽골에게 학살을 당한 곳은 인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수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인구=국력인 이상 각자 다른 방법으로 [[임진왜란|인접국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물론 각 전쟁의 원인은 여러가지겠지만, 국력이 모자라서, 만만해보여서 침공을 받았다는 대전제는 변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현대 몽골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나 반감이 생성된 것까지는 아니지만 한국인들이 몽골 제국의 역사를 왜 띄워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증폭된 것이다.[*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동양의 세계제국이었던 몽골에 대해 훨씬 우호적인 시선이 존재했는데 일부 한국인들은 이에 감정을 이입해서 몽골이 후에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한 일본과 서유럽을 정복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이러한 시선이 거의 사라졌다.] [[중국]]은 정부의 입장 및 공정 외에 별개로 일반적인 [[한족]]들과 [[몽골인]]들의 감정은 그리 영 좋지 않다. 특히 남부 지역 한족들의 [[몽골]]에 대한 감정과 외몽골의 [[몽골인]]들의 [[한족]]에 대한 감정은 불구대천의 원수이다.[* 전체적으로 중국 내에서 북방과 남방의 사이가 안 좋기도 하다. 이런 중국의 지역 감정은 [[둥베이|둥베이(만주)]] VS. [[광저우|광저우(광동)]]로 대표된다. 사실 [[신해혁명]] 발발 시에도 [[위안스카이]]의 적절한 조치로 어정쩡하게 지나갔으니 망정이지 광동을 중심으로 한 혁명 세력인 남군과 북양군으로 남북이 갈릴 뻔 했다.] [[바이두]]나 해외 아시아인 포럼에서 [[몽골인]]과 [[중국인]]의 댓글을 봐도 무지 살벌하다. 한족주의자들에게는 전 중국을 정복하고 한족에게 가혹한 통치를 펼친 [[원나라|대원제국]]은 야만적이라는 평가가 일반적.[* 물론 이런 반감은 [[만주족]]에게도 마찬가지라서 [[청나라|대청제국]] 역시 야만족이라고 폄하하면서도 한족 명나라를 마지막 중국 왕조로 보는 입장도 많다. 이 입장에서 대청 제국은 그냥 만주의 식민 지배였을 뿐이다.] 그런데 어쨌든 넓고 강했으니까 원나라를 최고로 치는 [[한족]]들도 꽤 존재한다.[* 사실 중국의 강력한 반몽감정은 [[중국 공산당]]이 의도한 탓도 크다. 공산당 [[일당독재]] 통치를 보다 수월하게 하기 위하여 자국의 중화민족주의, [[우생학]]을 과하게 추켜세우는 과정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 위주의 사관을 과하게 밀어주다보니 자연스럽게 비 한족 국가들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내릴 수 밖에 없다. 같은 중국 계열이지만 공산당의 터치를 받지 않는 대만에선 몽골에 대한 적개심이 별로 없는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이 점차 국수주의와 [[패권주의]]에 빠지며 몽골 제국의 발판을 만든 [[칭기즈 칸]]을 포함해 차이나 머니와 [[중화사상]]적 논리[* 이들의 논리가 몽골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니 중국인!이라는 [[동북공정]]식 논리이고 이 외에도 영상매체에서도 중국을 지배한 청나라 인물이 러시아 인물한테 우리들의 조상중에 징기즈칸이었다고 하면서 중국인이라는 듯이 포장하는 영상도 있다.]를 앞세워 원나라를 넘어서 몽골 제국이 [[중화제국]]이고 중국 위인이라고 [[동북공정|막북공정]]을 시전하는 중이다. [[일본]]도 [[규슈]] 일대를 중심으로 약간의 피해를 입었지만 현대인들은 몽골 제국에 우호적인 편이다.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대륙으로 건너가 [[칭기즈 칸]]이 되었다는 [[사이비 역사학]]이 대두한 것도 그렇고, [[원나라|대원제국]] 때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있던 일]]에 대해서는 침략으로 기억하지만 [[카미카제]]로 [[일본인]]들에게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후에 엄청난 혼란을 거쳐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무로마치 막부]]가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된다. 어찌되었든 [[후쿠오카시|후쿠오카]]를 제외하면 전 국토가 몽골의 말발굽을 피했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에 비해서도 몽골에 대한 감정이 괜찮다. [[티베트]]의 경우에도 징하게 항전하고 버텨내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지금은 호의적이다. 아무래도 [[청나라]]나 현대 [[중국]]에 정복당한 것에 비해서는 훨씬 옛날 이야기에, [[티베트|티베트인]]의 정체성인 [[티베트 불교]]가 [[몽골]]에서는 어느 정도 지분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티베트는 촘촘하게 행정력을 구사하며 수탈받은 곳이 아니라 거의 지방독립정권 수준으로 매우 관대하게 자치를 허용받던 곳이었다. 물론 관대함과 별개로 애초에 몽골 제국의 행정력 자체가 영 부실했던 탓도 있다. 몽골 제국 중에 [[원나라]]의 경우에는 [[티베트 불교]]가 성행하였다. 티베트 불교(후기 탄트라 좌도 밀교)는 한국, 중국, 일본에는 전파되지 않았고 원나라에 전파되었는데 [[원나라]]의 경우 중국에 세워진 몽골인 국가였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가 없던 중국에서 티베트 불교가 성행하였을 때는 원나라 때이다. 원나라가 사라지고 중국에서도 티베트 불교가 사라진다. 중국에서 다시 티베트 불교 세가 강해진 건 [[청나라]] 이후의 일이다. [[베트남]]은 코 앞에 붙어 있었는데도 3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뒤 이를 이끌었던 [[쩐흥다오]]가 민족 영웅으로 자리한 덕분인지 이런 취급을 받지 않는다. 여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는 밀림과 바다, 그리고 베트남이라는 방벽이 있어 접점이 크게 없었기에 관심이 크지 않다.[*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미얀마]]의 [[파간]] 왕조는 멸망하였다.] [[중동]] 지역에서는 직접 갈려나갔기 때문에 현재에도 평가가 나쁜 걸 넘어서서 증오의 대상이다.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의 역사서에는 [[칭기즈 칸]]이 아예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몽골군]]이 싸그리 밟아버려서 페르시아의 여러 옛 도시들이 지금도 유적지에 불과한 유령 도시로 남아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 많기 때문. 덕분에 몽골의 침입을 받았거나 전쟁을 치뤘던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아바스 왕조]]의 수도였던 바그다드가 몽골군에 파괴되었다.] [[이집트]][* 맘루크 왕조 시대에 몽골과 [[아인잘루트 전투|전투]]를 벌였다.]에서는 칭기즈 칸, 오고타이 칸 등 몽골 제국의 역대 군주들에 대한 평가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힉소스]]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란]]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편인데 반해, [[칭기즈 칸]]은 얄짤없이 악마로 분류된다. 몽골 제국도 오래된 역사이지만 알렉산더에 비해서는 훨씬 현대에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다.]과 함께 최악의 침략자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특히 몽골 제국의 서아시아 침공 선봉장이었던 [[튀르크]]인에 대해선 그야말로 극악의 증오심을 갖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튀르크계 종족인 [[하자라족]]의 경우가 바로 이 튀르크 군인들의 후손들인데, 아프간을 박살낸 몽골 제국의 후예라는 것과 소수인 [[시아파]]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고 어렵게 산다. 이는 다른 튀르크계인 [[우즈벡]]이나 [[키르기즈]], [[투르크멘]] 등도 마찬가지라 이 셋이 연합해 북부 동맹을 구성해 [[탈레반]]과 싸우기도 했다. 이란 역시 몽골 - 튀르크와 관련된 것들은 본능적으로 증오해 이웃 나라인 [[터키]]나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국가들을 되게 고깝게 본다.[* 튀르크 계를 미워하는 것은 몽골의 영향도 있지만,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영향이 더 크다. 오스만 같은 경우 전략적 요충지였던 현재의 이라크 일대의 영유권 분쟁에 같은 이슬람이라도 시아파냐 수니파냐 하는 종교적 분쟁을 이유로 수백 년 동안 서로 치고박고 하던 사이다.] 서아시아의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은 훗날 [[허를러깅 처이발상]]에 의해 칭기즈 칸의 후손들이 몰살당한 것에 대해 몽골 제국의 서아시아 침략의 업보로 여긴다. 다만 몽골 제국의 직접적인 침입을 받지 않았거나 진출하지 못했던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아랍에미리트]], [[알제리]], [[리비아]], [[모로코]], [[튀니지]] 등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의 아랍권 나라들에서는 이라크나 이란 등에 비해 몽골에 대한 증오감은 약한 편이다. [[인도]]의 경우는 수십 년에 걸쳐서 여러 번 침략이 있었지만, '''시대별로 인도에 있던 왕조들이 모조리 몽골 제국과 [[차가타이 칸국]]으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몽골 제국에 대한 이미지는 그냥 아시아의 자존심 정도에 그친다. 그리고 [[무굴 제국]]은 투르크화된 몽골의 바를라스 부족이 주측이 된 국가로, 몽골 제국의 후손을 자처하고는 있었으나 문화적으로는 페르시아화된 투르코-몽골계 국가였다. 그리고 그 침략당한 [[인도]]의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네루]]도 칭기즈 칸에 호의를 표한 걸 보면 19세기 ~ 20세기 동안 유럽의 지배를 받은 아시아의 자존심을 세워주기에 우호적으로 여겨진 듯 하다. 이렇듯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는 몽골 제국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서구에서는 야만성을 강조하는 느낌이 큰 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주로 직접 갈려나갔던 [[폴란드]]나 [[체코]], [[러시아]][* 몽골에게 점령당했던 기간을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른다.]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이미지가 안 좋고, 접점이 별로 없이 강 건너 불구경이었던 [[서유럽]] 쪽에서는 그냥 이전의 [[훈족]]과 더불어 야만적인 유목인의 이미지 정도만 갖고 있다. 서유럽 역사상 가장 크게 당한 유목민 침략은 [[마자르족]]의 침략인데 문제는 이 마자르족이 또 외모,종교,문화 모든 면에서 완전히 유럽국가로 동화 되었기 때문에 결국 서유럽은 쳐들어오지도 않은 몽골과 기독교 세계의 방패를 자처할 정도로 동화된 마자르족 대신 고대 로마제국의 몰락을 촉진한 훈족을 가장 임팩트 있었던 유목민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경우는 직접 갈려나가고 정복당한 데다 지역 특색 상 털어먹을 게 없어서 제대로 통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몽골에 대한 여론이 더 안 좋다. 러시아 속담 중에 [[초토화]]당했다는 뜻을 가진 속담이 있는데, 그 속담이 '''"몽골 제국군의 말발굽이 지나간 곳은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시뻘건 땅이었다."'''이다. 그런데 사실 몽골 제국에게서 벗어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점이다. 몽골 제국이 러시아 지역의 정치를 [[모스크바 공국]]에 전임하였고, 후에 [[이반 3세|이반 대제]]가 몽골 제국을 몰아낸다. --그 과정에서 심각한 탈세가 있었다.-- 여하튼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완전히 초토화된 데다가, 그 이후로도 타타르계 국가들에게 허구한 날 시달려서 이 피해를 복구하는데 거진 몇 백년이 걸렸다. 그리고 몽골의 침입과 이후 틈을 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확장으로 인해 동질감이 강하던 루스족들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으로 분화되어 현재까지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대립하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으니, 루스의 대표자를 자처하는 러시아 입장에선 루스의 분열을 부른 철천지원수인 셈. 이 때의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았는지, 훗날 소련은 몽골에게 내정 간섭을 심하게 하면서 칭기즈 칸의 흔적을 지우려고 별짓을 다하기도 했다. [[폴란드]]의 경우는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당시 수도인 [[크라쿠프]]가 불타고 제2도시인 [[바르샤바]]도 [[초토화]]되었다. 때문에 몽골 제국군에 대해 안 좋게 여기지만, 또 [[칭기즈 칸]]에 대해서는 "[[폴란드/역사|폴란드의 역사]]에 매우 큰 도움을 줬다"며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폴란드의 도시들이 불에 타긴 했지만, 결국 폴란드는 몽골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몽골군을 폴란드 땅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몽골 제국이 폴란드 침공에 지쳐 마지막으로 폴란드를 침공하고 난 1360년대부터, 몽골은 급격히 [[동유럽]]의 패권을 상실했다. 그 사이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몽골 제국의 위축으로 생긴 동유럽 힘의 공백을 비집고 10년도 안 돼 세력을 팽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385년]]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와 [[동군연합]]을 세워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만들어 400년간 [[동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결론적으로 '''몽골이 동유럽인들을 마구 죽여준 덕분에 폴란드는 별로 힘 안 들이고 동유럽 땅을 점령한 셈이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몽골의 직간접적인 지배를 받던 현재의 우크라이나 북부 지방과 벨라루스 전역을 지배하였고, 이는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이 러시아인과는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캅카스]] 지역의 일부 국가들은 정복당했지만 일부는 침공에 저항하여 땅을 지켜냈다. 이 지역은 여러 산맥이 얽혀 있어 지세나 그에 따른 세력관계가 매우 복잡하지만 '''전략적 요충지'''[* 후에 다른 제국들도 이 지역을 서로 탐하려고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에는 [[러시아 제국]]이 점령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점령된 적이 없다.]라 몽골 제국이나 몽골 계열 국가들이 자주 공격하는 지역이었다. 칭기즈 칸 때 제베와 수부타이가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크게 이겼고 이후 일 칸국 때 본격적으로 침공해 속국이 된다. [[체첸]] 같은 북부 지방은 2차례 침공을 이겨냈으나 긴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터키]]는 몽골 제국의 장군들의 대부분이 [[튀르크]]계로서 [[유럽]]이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원정에 참가하였고 [[킵차크 칸국]]이나 [[일 칸국]], [[차가타이 칸국]], [[우구데이 칸국]] 등이 전부 [[몽골]]-[[튀르크]] 제국이었다는 이유로 몽골 제국에 호의적이다. [[칭기즈 칸]] 역시 [[아랍]]이나 [[이란]]과 달리 같은 [[알타이]]인으로서 영웅으로 보고 관련 학회도 많이 있다. 사실 [[튀르크]]인 자체가 원래 몽골계 종족이었고[* 정확히 말하면, 튀르크인을 몽골'''계'''라고 정의하는 것은 완전히 틀렸다. 튀르크계와 몽골계 모두 유라시아 북부 스텝지방의 유목민에 속한 계열의 민족집단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당하다. 즉, 유라시아 북부의 유목민들 중에는 튀르크계와 몽골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고, 더 엄밀히 말하자면 튀르크계가 몽골계보다 좀 더 먼저 등장한 유목 민족 집단인 것. 튀르크계나 거란계등이 유목제국화하여 스텝 외부의 풍요로운 지역을 정복하면서 스텝 지역에 세력의 공백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이전까지 스텝 북족의 타이가에서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몽골계가 남하하여 유목민족화한 것이라고 보면 적절하다. 물론 유목 부족 전통을 공유하여 강한 문화적 동질감을 가지고 있던 투르크계와 몽골계는 정확히 구별할 수도 없고, 사실은 딱히 구별할 필요도 별로 없긴 하지만, 튀르크계를 '몽골계 종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라시아 북부 스텝의 유목민은 곧 몽골인'이라고 착각하는 전형적인 오류이다.] 몽골 통일 이전에는 [[외몽골]]에 키르기즈나 나이만, 메르키트, 케레이트 등 여러 [[튀르크]] 부족이 섞여 살았다는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둘은 형제나 다름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몽골로 인해 셀주크가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셀주크 튀르크가 망한 이유는 내분 때문이다. 이 내분에 몽골이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몽골족이 몽골고원을 통합하여 유목제국화 하기 한참(한 세기 반 이상)전인 서기 1100년 전후에 셀주크 제국은 이미 심각하게 파편화 된 상태였다. 예를 들어, 셀주크 제국의 핵심부였던 이란-페르시아 지역만 보더라도 몽고가 이 지역을 공격한 1200년대 초반에는 이미 [[호라즘 왕조]]가 (범 셀주크계 세력의 종가격이었던) [[셀주크 제국|셀주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차지한 상태였다. [[셀주크 제국]]의 심장부였던 이란 지역이 이 정도니 다른 지역은 더 말할 나위도 없어서, 중동-서아시아 지역의 경우 각 도시마다 그 영주가 술탄을 칭할 정도로 격심한 분열상태였기에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 즉, 몽골이 이 지역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시점에 셀주크 제국은 이미 극도로 파편화되어 사실상 붕괴수순을 밟고 있었고, [[셀주크 제국]]이 몽골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것은 그냥 이미 제국이라고 부르긴 어려운 규모로 분열된 범 셀주크계 세력들을 일소한 것이 몽골이라는 의미 정도밖에 없다. 반면 [[아바스 왕조]]는 몽골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별 신경쓰지 않고 좋게 보며 이는 [[티무르 제국]][* [[티무르 제국]]을 세운 [[티무르]]는 스스로 자신이 모계를 통해 [[칭기즈 칸]]의 혈통을 이었다고 주장했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냥 같은 튀르크계 부족끼리의 알력 다툼 정도로 보는 듯. 물론 남쪽의 아랍인들에게는 몽골이나 튀르크나 둘 다 죽일 놈 취급을 할 뿐이며 특히 몽골 제국의 앞잡이였고 이후 [[오스만 제국]] 당시 [[아랍인]]을 차별한 투르크인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다른다. 더군다나 오스만 제국 황제가 썼던 칭호 중에는 몽골족이나 튀르크족의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 '칸'이 어원인 '한'도 있었으니 아랍인들의 입장에서 오스만 제국은 몽골 제국 시즌2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덕분에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겪었던 [[이라크]]나 [[시리아]] 같은 중동 아랍권 나라에서는 [[터키]] 이야기는 민감하다. 서구 학계에서는 원래 야만적인 파괴의 제국이라는 평가가 강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동서양 교류의 촉진을 통해 세계사 발전에 큰 영향을 줬다는 [[재평가]]도 힘을 얻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도 이전까지는 몽골과 유목민족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자체가 부정적이었지만, 현재는 정체된 한족의 중화 문명에 유목 민족이 끊임없이 일종의 문화적, 인적 수혈을 해주었다는 긍정적인 견해 또한 제시되고 있다. 그래도 몽골 제국이 죽인 인구[* 각종 분야에서 영향을 끼치던 학자들도 행방불명이 되거나 사망]와 소실시킨 지적 유산[* [[도시]]나 [[도서관]]에 대한 파괴나 방화를 해서 여러분야의 서적도 많이 사라졌다.]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몽골 제국이 가지고 온 파괴와 학살과 별개로 몽골 제국과 그 후계 [[중앙아시아]] [[유목 제국]]들이 유라시아 동서 문명 간 교류 역사에 거대하고도 새로운 장을 쓴 것만큼은 확실하다. 몽골에서 비롯한 [[칸]]이라는 호칭은 훗날 [[만주족]]에서 [[페르시아]], 심지어 [[러시아 제국|제정 러시아]]의 [[차르]][* 정복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을 상대로 '''[[백인]] 칸'''이란 칭호를 내세웠다.]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국가들에게 '''무적의 군사력을 가진, 절대적인 권위의 지배자'''로서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형성했으며, 이뿐만 아니라 중세 후기의 [[티무르 제국]]과 후대의 [[오스만 제국]]마저 [[칭기즈 칸]]과 몽골 제국의 권위를 빌려 정복 제국으로서 그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을만큼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문명사에 남긴 영향은 몹시 크다. [[마르코 폴로]]의 중국 답사는 [[실크로드]]가 몽골의 통치 아래 마지막으로 안정적인 번영을 누렸던 때였고, 13세기 당시 [[아프리카]] [[사하라]] 횡단 무역도 몽골 제국과 교역 시 성행했다. 이러한 몽골 제국의 영향력으로 인해 [[대항해 시대]]와 같은 [[근대]]의 발판이 마련되었으니, '''[[칭기즈 칸]]의 영토 확장과 몽골 제국 성립'''이라는 사건은 단순히 역사상 최대 크기의 황제국 출현이라는 점을 넘어 세계사의 분수령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